식민지시대 구술사 연구와 몇 가지 문제 성숙경・김지형(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식민지시대
구술사 연구와 몇 가지 문제
성숙경・김지형(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1. 들어가며
일제강점기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치, 경제적 구조나 제도, 민족운동, 계급운동 등의
거시적 측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전체적인 사회변동과 방향, 성격 등에 대해 밝혀냄으로써 일본의 식민정책과 강점기 조선사회의
모습을 구명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거시사, 거대담론 중심의 연구 경향은 이 시기의 역사를 ‘친일과 반일’, ‘민족과 반민족’, ‘수탈과 저항’과 같은 도식화된 이분법적 구도를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역사의 주체인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들은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어떠한 고통을 겪었고, 어떠한 기회나 가능성을 갖고 있었는지 등의 미시적인 부분을 파악하는 데는 미흡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삶의 이면에는 ‘침략과 저항’, ‘억압과 동화’라는 이분법적
틀로 재단할 수 없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이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있다.[1]
기존의 거시사 중심의 연구에서는 도외시되었던 문화적 측면과 일상생활이라는 미시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간이나 성별, 신체 여가, 시각적 재현 등 이러한 주제의 연구들은
그동안 암울하게만 여겨졌던 식민지시기 역시 현대 우리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친근감 내지 현대 우리의 생활에 모태가 되는 성격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결을 지니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보다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연구시각의 변화는 물론 연구자료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총독부의 공식문서나
통계자료 등을 비롯한 문헌자료 등을 통한 접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깊이
있게 해석(thick
description)’할 수 있는 적절한
연구자료의 발굴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아울러 역사를
보는 관점 역시 위에서 보는 역사가 아니라 밑으로 보는 역사로 전환되어야 한다. 당시를 살아온 민중들의 목소리, 즉 ‘당대인들의 口述’은 근현대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구술사는 근대 역사학이 비추지 못한 외진 곳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구술사 연구는 공식적 역사에서 흔적이 없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장치나 기회가 거의 없는 소수자. 여성, 농민 등의 피지배층을 주 대상으로 하여 심층면접 및 구술자와 조사자 간의 상호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다.[2] 요컨대, 국가나 왕조가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권력자나 명망가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에서, 공식문서나 문헌이 아닌 일반인의 기억을 토대로,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일을 바탕으로 역사를 쓰려는 노력이다.
구술사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일제강점기 연구는 이 시기의 역사인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구술사 연구의 현황과 몇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 구술사 연구의 가능성과 문제점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2. 식민지시대 구술사 연구의 현황
식민지 구술사 연구는 일본군 ‘위안부’나 독립운동가, 재외동포 등 특정대상을 중심으로
한 증언집의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최초의 성과는 1990년대에 들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와 한국정신대연구회의 주도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1~3(한울, 1993, 1997, 1999)과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1995) 등이 발간되며 첫발을 내딛었다. 증언집(1)에는 19명, 증언집(2)에는 15명, 증언집(3)에는 14명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고, 중국 잔류 피해 여성의
증언집에는 10여명의 증언이 담겨 있다. 이들 증언집은 일제의 만행과 반성하지 않는 현대 일본사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었다. 채록한 내용의 전후 맥락에 따른 사실관계를
연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고 구술자들에 대한 비주체화나 재현의 부적절 등 초기 구술사 연구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대협은 1999년부터
구술사 전문연구자들과 함께 구술사방법을 훈련받은 사회학, 여성학, 법학, 영화, 신학, 역사 등 다양한 전공자들로 이루어진 증언팀을 구성하였다. 증언 작업의 문제의식을 담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4(풀빛, 2001)를 발간했다. 이 증언집은 기존의 자료집과 달리
“증언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라”는 정신에 입각해 충실한 재현에 힘썼고 한국의 노인 여성들의 기억이 어떻게 ‘공식’ 역사와
경합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이들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시사하였다. 증언집(5)와 증언집(6)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하여 만들어졌다
한편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일환으로2001년과 2002년에 걸쳐 독립유공자 20명의 증언을 채록하였다. 증언자들은 광복군 출신, 국내항일운동, 학생운동, 중국방면, 일본방면으로 대상이 구분되었고 구술내용은 『독립유공자
증언자료집』Ⅰ~Ⅱ(국가보훈처, 2002)로 출판되었다. 한편 해방 60주년을 맞은 2005년 4월부터는 독립운동가 280명이 구술하는 “영상기록-생존독립운동가의 일상(가칭)”을 제작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구술사연구소’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재일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고통의 역사: 원폭의 기억과 증언』(정근식 편, 2005) 등의 개인 연구성과도 있다.
지난 2005년 원폭투하 6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된 이 책에는 당시 원폭을 경험한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또한 재외 학자의 연구로는 식민지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일원의 한국인 교포들을 인터뷰한 힐디 강(Hildi Kang)의 Under the Black Umbrella: Voices from
Colonial Korea, 1910-1945 (Ithaca &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등을 들 수 있다. 힐디 강의 연구는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
그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라는 특정지역에 국한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육정도나 연령, 종교나 출생지 등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함으로써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
이상의 성과를 종합해보면 그 동안 식민지 시대를 대상으로 한 구술사 연구는 일본군 ‘위안부’나 독립운동가, 원폭피해자 등 특정대상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경험과 기억은 강렬하지만 보편적이지 못하다. 모든 구술사 연구가 보편성 내지는 일반화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기억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장 평범한 식민지 민중의 경험은 아직 증언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식민지
시대, 즉 제국주의 권력이 직접 미치지 못하는 일상의 광활한 내면, 그곳에서 회피하고 타협하며 ‘협동’하거나 ‘고집’부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역사의 피안에 남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4]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서자료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식민지 민중의 삶이 갖는
생생함을 복원해줄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아래에서는 힐디 강이
채록한 인터뷰와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에서 채록한 어느 노부부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경험한 한 노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식민지 시대를 되돌아 보려
한다.
3. 식민지를 기억하는 몇 가지 방식
사례(1)-3.1 운동의 충격 : 경기도 지방에 살았던 박준기(1914년 출생)는[5]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섯 살이었으나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러 간다고 웅성거릴 때, 어린 그는 매달려 놀던 감나무 가지에 올라 영문도 모른 채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나타나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보고는 겁에 질려 할머니와 함께 골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 젊은이를 일본 경찰이 칼로 내려찍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3.1운동이라는 충격적 경험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3.1운동을 겪지 못한 1920년대 출생자들과 가장 구분되는 지점이다.
사례(2)-은혜로운 일본인 :
경상남도 양산의 깊은 산골에 살던 홍을수(1905년 출생)의[6]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양반임을 자처하는 그의 아버지는 게으르고 무책임했으나 양반가장으로서의 권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였다. 홍을수는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의 교육이라 하여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 총독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 이후에도 그의
아버지는 사흘이나 그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가정은
어머니의 고달픈 노동만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어머니가 깊은
산골 숯가마에서 두 짐을 받아다 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식구들이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번 돈 몇 푼을 훔쳐 그는 18킬로나
떨어진 물금을 거쳐 부산으로 갔으며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얼마나 가난했던지 옷이라고는 오직 두벌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더울 때 입는 것이고 또 하나는 추울 때 입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추울 때 입는 옷은 빨 새가 없어 더럽고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오사카로 가는 열차에서 아무도 그의 곁에 앉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사카에서 도쿄로 옮긴 그는 심야에만 영업을 하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가게의 주인은 야쿠자였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면 하루 세끼의 밥과 잠자리가 주어졌다. 그로서는 처음 얻는 안정이었다. 성실하게
일한 그는 야쿠자 주인이 운영하는 한 가게의 점주가 되었고 한 달을 일하면 야쿠자 주인은 그에게 10엔을 계산해 주었다. 그는 밤에만
일하면 되었기에 낮에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일본 생활은 이어졌으며, 학업에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1926년 어느 날 야쿠자 주인은 그를 불러 지금처럼 살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다며 너무
늦기 전에 일을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주인은 홍을수의 몫으로 몰래 저축해 두었던 상당액의 돈을 주었고 그가 해야할 일의 부담도 크게 줄여 주었다. 홍을수는 “이런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수도 없이 인사를 했고 야쿠자 주인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며 그를 격려했다. 이렇게 해서 1936년 그는
미국인들이 운영하던 아오야마 크리스챤 대학을 졸업할 수가 있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영어교사로서, 섬유사업가로서 그는 성공을 계속했다. 갈아입을 옷도, 세끼 먹을 기본양식도
없었으며, 무능하고 완고한 아버지 때문에 문맹상태로 살아야 했던 홍을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일제시대는 가난과 봉건적 질곡의
사슬이 풀리는 때였고 일본은 기회의 땅이었으며 일본인은 은인이었다.
사례(3)-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관헌 : 그런가 하면
충청북도에 살던 막일꾼 정금재(1919년 출생)는[7] 식민지 시기에 관해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았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아버지의 명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가 철도부설의 하층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식당주인의 눈에 띄어 식당에서 돼지와 소를 먹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식당의 고기를 훔쳐먹는 고양이를 잡으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는 덫을 놓아 고양이 한 마리를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 고양이가 그 지역 지서주임이 애지중지하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는 지서로 잡혀갔다. 지서 주임은 그에게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숙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벽에서 일본도를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겁에 질린 그는 지서주임이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 그의 사타구니를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찼다. 엉겁결에 일격을 당한 주임은 쓰러졌으며 겁에 질린 정금재는 쓰러진 주임에게 마구 발길질을 가했다. 그리고는 바로 도망쳤다. 이곳 저곳 숨어 살던 그는 요행히 체포를 면할 수 있었지만, 그 지서주임은 결국 실명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먼 훗날 듣게 되었다. 정금재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거나 그 때의 일을 입에 올릴 때면 항상 몸이
떨리는 무서움에 시달린다고 한다.
살기위한 본능적 행동이 한 일본인 경찰관을
실명으로 몰고 간 것인데, 그에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악질 경찰을 혼내준 자랑스러움보다는
떨칠 수 없는 공포로 남아 있다.
사례(4)-전시체제 하의 조선인 : 이○○(1924년 서울출생)은[8] 다섯 살 무렵부터 음성군청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함께 음성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지주로서 경제적인 면에서 여유로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커다란 초가집에서 쌀밥을 먹으며, 두툼한 솜옷 대신 서울에서 사온 내복을 입으며 자라났다. 무난히 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청주고보로 진학하였다. 대부분 잘 사는 집 안의 자녀들이 다녔던 청주고보에는 일본인 학생들도 조금 있었다. 교사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한국학생과 일본학생들 사이에 특별한 차별이나 갈등은 없었다. 그에게는 한국인 친구나 일본인 친구 모두 똑같은 친구였을 뿐이었다. 그는 친구로서 이들과 함께 운동 등을 즐기며 학창시절을 보냈을 뿐 민족적 차별이나
반일감정 등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되자 비교적 안정적 삶을 살아온 그의
청년기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수업이 끝나면 모래자루를 어깨에 메고 달리거나 ‘斥米國’이라고 써서 세워놓은
나무판을 쓰러뜨리고 총쏘는 훈련을 받는 등 ‘전투훈련’을 해야 했다. 또한 일주일에 한번씩은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창시개명이 강제되자 청주고보 재학 중 ‘마츠시마 마사하루(松島正治)’로 이름을 바꿨다. 이왕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면 일본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다른 사람들이 개명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지었다. 제국의 전쟁으로 인해 평온한 그에 삶에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제국민으로서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주고등학교 5학년인 1944년 징병 1기생으로 중국 전투에 투입되며 그의 삶과 의식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였다. 징병소집은 그에게 죽음을 통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으러 간다는 심정으로 징병에 소집된 그는 예방접종 등의 간단한 절차를 마친
뒤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쟁 중 부상으로 입기도 하였고, 탈영하다 붙잡혀 처형되는 동료들을 보며 공포를 느끼기도 하였다. 산속에서 일본의 패전소식을 접한 그는 중국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배급받은 밀가루로 연명하던 가운데 1946년 5월
미국화물선으로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제국민으로
동화의 길을 걷던 그에게 전시체제기 동원의 경험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각성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사례(5)-동화해가는 帝國民 : 사례(4)의 이○○의 부인인 김○○는[9] 1923년생으로 경상북도 아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부유한 지주집안이었다. 집에는 머슴이 있었고 ‘아씨’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 당시로서는 여자가 공부를 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집안형편과 개명한 할머니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8살이 되던 해 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보통학교 시절 천황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추운 겨울 운동장 모여 ‘국가’를 부르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소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1938년 김천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인 학생은 한 학급에 15명 정도로 전체 학급정원 50명에 1/3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생활에서 조선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던 기억은 드물다. 물론 조선어을 쓴다거나 학교의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여학교였던 까닭에 특별히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본어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일본어 사용의 사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가족들이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집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했지만 집
밖에선 언제나 일본어를 사용했다.
심지어 한국인 친구들과도 일본어로 대화를
했고 그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시기 그녀에게서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은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 선생님에 대해서도 단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해할 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민족적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학창시절은
‘구아노 미찌코’나 ‘사부리싱’ 같은 일본 배우들의 사진을 수집하거나 한달에 한번씩 영화관을 찾은 유한계급 자녀의
안락한 삶으로 채워져 있다. 여학교 2학년 때에는 ‘가나오카 미사코’(金岡美紗子)라는 직접 지은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4학년이 되던 해(1941) “대동아
전쟁”이 확대된 이후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을 전송하는 일에 동원되곤
했다. 하지만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군가를 부르고 전송을 했지만 학교에서
시키니까 그러려니 하며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면모는 1920년대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제국민으로 편입되고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학창시절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도쿄로 떠난 졸업여행을
꼽는다. 도쿄의 으리으리한 백화점과 크고 좋은 건물들,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도로를 걸으며 그녀는 일본을 보다 강렬하게 체험하였고,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현지인들에게 “어느 縣에서 왔냐?”는 질문을 받았으며 어깨를 으쓱했던 기억마저 잊지 않고 있다. 학생으로서 식민지 시대를 보내며 특별한 피해를 받지 않았던 그녀는 일본의 지배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일본에 대해 어떠한 점에서는 조선을 개화시켜준 존재로 인정
한다. 그녀에게 식민지인으로서의 공포의 대상은 단 하나, 일본인 순사였다. 그녀는 “좌우간 순사라고
하면 겁이 났다.” 고 했다. 이웃 사람들이 식민지배로 인해 조선에서 살지 못하고 만주로 떠나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고, 공출이 확대되며 그녀의 집안 역시 얼마간 돈을 내야 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식민지 시대는 즐거웠던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채워져 있을 뿐, 누구에게 피해나
차별을 입은 기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녀는 김천여고를 졸업한 지 40년 이상 지난 1988년 일본에서 열린 총동창회에 참석해 즐거웠던 옛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사례(6)-식민지백성에서 일본유학생으로 : 이○○(1919년생)은[10] 함경남도
갑산군 운총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압록강 하나를 두고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활동을 하는 이들을 적지않게 목격하였다. 소학교 시절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부탁을 받고 서신을 옷고름 속에 숨겨 여러 차례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하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독립운동가들을 어렴풋하나마 인식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함흥사범학교를 나온 그녀의 둘째오빠가 독립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1년간 복역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커져갔다.
하지만 소학교 졸업 이후, “선진국 일본에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돌아오리라는 일념으로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동경의 浜田(하마다)병원의 조산학과정 입학시험을 통과한 후 이곳에서 2년동안 조산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하마다병원 기숙사에
머물며 조산학과정을 공부하던 시절, 가끔씩 상급생들이 민족적 비하가
담긴 말을 하기도 하여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혼슈, 홋카이도, 규슈, 대만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신자들로 구성되었던
동기들과는 별다른 마찰없이 사이좋게 공부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고향에서 학비가 도착하지 않아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사감과 홋카이도 출신의 학생으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 시절 그녀는 소매치기가 없는 일본백화점과 전철의 자동문, 그리고 친절한 일본인 환자들의 모습들을 경험하며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해방 직후, 조선사람들을 피해 그녀의 집에 뛰어들어 온 일본인 부부를 다락방에 숨겨주었다가 한국인
옷으로 갈아 입혀 용산역까지 배웅한 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운명은 역시 일본 유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이지대학 뒷편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열리던 유학생들과의 모임을 통해 그녀는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신념을 키워나갔고, 한 유학생의 부탁으로 유학생 조직책의
명단을 한달간 기숙사에 숨겨주기도 하였다. 결국 그녀에게 일본유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동경’으로 바꿔놓는 계기이자 동시에 식민지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4. 남겨진 문제들
(가) 출생시점과 개인적 경험의 문제
몇 가지 사례로 일반화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출생시점의
차이가 그들의 기억을 좌우하는 구조적 요인의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먼저 1900~1920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은 멸망해버린 대한제국의 존재를 경험하거나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고, 사례(1)의 구술자처럼3.1운동이라는 거국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원초적인 민족의식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반면1920년대에 출생한 사례(4)와 (5)의 구술자들은 ‘문화정치’의 자장 속에서
성장했고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대한 일차적인 거부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 식민지배와 일본어 사용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일상이었기 때문에 원초적인
민족적 정체성을 견지하기 힘든 것이다.
한편 이번 사례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1930년대 이후의 출생자들은 해방 무렵 10살 내외였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기억보다는 6.25전쟁과 전후 복구로 이어진 이후의 경험이 좀더 깊이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1910년대 출생자들이 사실상 생존해 있기 어려운 시점에 도달했고 생존해
있더라도 구술할만한 기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식민지 시대를 구술이라는 방법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는 1920년대 출생자들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구술을 통해 복원할 수 있는 시기는 1930년대 이후일 가능성이 크며 식민지 초기의 역사는
사실상 채록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출생시점 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 역시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1920년대 출생자들 가운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식민지 경험이 대부분 학창시절과 겹치기 때문에
사례(4)와 (5)에서 나타나듯 수학여행과 은사님, 그리고 교우관계 등에 집중되고 있어서 우리가 배워온
공식적인 역사와의 길항관계를 살펴보는데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또한 사례(6)의 경우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가운데도출신지역(혹은 성장지역)의 특성과 개인적 경험의 차이가 기억체계에 보다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여타 지역 출신자들의 구술과 비교해 보아야만 그들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에 대한 명확한
의미부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나) 잠재된 불안
1920년대 태어난 10대 소년 소녀의 기억 속에 일본인과의 차별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술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들 역시 일본인과 같은 1등 국민이 아니란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가령 사례(4)의 구술자는 고보를 나왔지만,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반일정서를 드러낼 경우 감옥에 간다는 사실(“일본은 졌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을 잘 알고 있었다. 창씨개명 당시 최대한 일본인처럼
보이는 이름을 선택한 것 역시 식민지에서 조선인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례(5)의 구술자의 경우에도 학교에선 조선말을 쓰면 엄한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초래할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불안이 이들에게 동화의 길을 걷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구술사적 방법론의 활용이 식민지시대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복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역사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에 대한 고통과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일본이 만들어 놓은
근대적 문물, 제도에 대한 동경을 보이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하층민들 가운데 조선시대보다 일제시대가 더 좋았다고 회사하는 사례1)도 있다. 이러한 기억 역시도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개인들의 기억 가운데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몇 가지의 부분적 사례들을 바탕으로 식민지시대를 살아갔던 조선민중의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식민지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역사상에 근거하지 않은 채 구술사의 자료만을 바탕으로 를 통해
식민지시대를 복원하는 것은 자칫 또 하나의 그릇된 역사상을 만들어 내지 염려가 도사리고 있다. 식민지시대에 대한 구술사적 방법론은 분야사나 일상사, 문화사 등의 연구에 활용하며 그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1] 이와 같은 경향을 반영한 연구성과로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일제의 식민지배와 일상생활』(혜안, 2004)과 방기중 편, 『일제 파시즘 지배정책과
민중생활』(혜안, 2004), 공제욱ㆍ정근식 편, 『식민지의 일상-지배와 균열』(문화과학사, 2006) 등이 있다.
[5] Hildi Kang, Under the Black Umbrella: Voices from Colonial Korea , 1910-1945(Ithaca
& London :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 21
[6] Hildi Kang, Under the Black Umbrella: Voices from Colonial Korea , 1910-1945 (Ithaca
& London :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 15, pp. 24-27
[7] Hildi Kang, Under the Black Umbrella: Voices from Colonial Korea , 1910-1945 (Ithaca
& London :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p. 1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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