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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研究ワークショップ   趣旨説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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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年3月2日              崔承喜研究ワークショップ            趣旨説明      九州大学  松原孝俊     1945年以前において、 1930 年代の日本に、突如としてデビュー Debut し、大人気を博した女性舞踊家を、私たちは決して忘れてはいけない。「半島の舞姫」の崔承喜である。崔承喜の生涯は鄭昞浩著『踊りを踊る崔承喜』に譲るが、彼女は、 1930 年代の日本において「人気の最高峰」に上り詰め、作家川端康成に絶賛される。ただし、川端康成は、舞姫崔承喜を「日本一」と認定した。 彼女は化粧品や鉛筆・歯磨き粉などのポスターで、「稀に見る美貌。恵まれたる肉体」を日本国内と日本植民地空間に披露した。あるいは、東京近郊の夏の鎌倉海岸で、崔承喜は、当時にあって裸体に近い半袖半ズボン姿でクラシック・バレーを踊る。その姿をカメラに納めた写真家桑原甲子雄は「エロスの女神」であったと語る(桑原甲子雄『夢の町』晶文社、 1977 年)。  崔承喜の年譜によると、人気絶頂期にあった 1937 年 9 月 27 日の「渡欧告別新作発表会」(東京劇場)の後、 1937 年 12 月に欧米公演旅行に出発した。まずアメリカ大陸に渡ったのを契機に、ヨーロッパのフランス・スイス・イタリア・ドイツ・オランダ・ベルギー・フランス各国で巡回公演を続けた。さらにアメリカに戻り、ニューヨークを初めとして各地で公演を成功させて、その勢いでブラジル・ウルグアイ・アルゼンチン・ペルー・チリ・コロンビア・メキシコの南アメリカ各地で公演をおこなった。 1940 年 12 月 5 日に崔承喜は日本に帰着するが、それは大東亜戦争の開戦前の約 1 年前であった。約 140 回の欧米公演(『報知新聞』 1940 年 12 月 7 日)では、日本国内の「半島の舞姫」ではなく、 「支那事変の影響を受けて排日的気分の濃厚なアメリカに乗り込んで、敢然祖国のため朝鮮舞踊を紹介して歩いている半島の舞姫崔承喜」(『都新聞』 1938 年 7 月 27 日) であった。手元に残るヨーロッパ公演のポスターを見ると、彼女は日本人ではなく、「 Korean Dancer 」と明記して出演していた。もっとも彼女のパスポートは日本政府発行であったので、彼女の氏名は日本読みの「 Sa

『패전국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일본인

서울대학교심포지엄발표원고   ( 2009 년 5 월 2 일 ) 『 패전국일본 』 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일본인                                          松 ( matsu ) 原 ( bara ) 孝 ( taka ) 俊 ( toshi ) ( 규슈대학 )                 1 본발표의 목적은 1945 년 8 월 15 일 정오 , 소화 ( 昭和 ) 천황에 의한 종전조칙 ( 詔勅 ) 이 방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한반도에는 「 패전국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일본인 」 이 왜 출현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고찰하는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옥음 ( 玉音 ) 방송은 많은 난해한 어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 더구나 라디오의 수신 상태가 나쁘고 , 잡음때문에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기에 , 사람들 중에는 「 본토 결선의 각오를 재촉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 라고 하는 웃기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 일본열도뿐만 아니라 북쪽의 화태 ( 樺太 ) 중국동북부에 건국된 만주와 중국대륙전역 , 그리고 한반도 , 대만등지에서 , 같은시간 「 황국신민 」 들을 향해서 독특한 억양을 가진 천황의 옥음방송이 전파를 탔다 . 그러나 만주에서는 약 150 만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의 상당수가 소련군의 진군을 피해 도망다니기에 급급하여 옥음방송을 들을 만한 정신적 , 시간적 여유는 전혀 없었다 . 「 오족협화 ( 五族協和 ) 」 를 믿은 만주거주일본인의 상당수는 충분한 식량 · 숙박장소마저 없이 , 도보 또는 뚜껑없는 화차에 몸을 실어 피난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 옷이나 신발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8 월 15 일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   한반도의 38 도선 이북도 사정은 만주와 동일했다 . 서둘러 한반도를 남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