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관련 연구사 및 구술사 현황 (Trends in the Study and Oral history of Japanese in Colonial Korea) 김소영・한승훈 (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1]


한국 내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관련 연구사 및 구술사 현황
(Trends in the Study and Oral history of Japanese in Colonial Korea)

김소영한승훈 (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1]



1. 한국 내 구술사 일반 연구 현황

한국에서 구술사 연구는 민중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어 가던 1980년대 말부터 초보적인 수준으로 시작되었으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여전히 구술은 사료로서 인정되지 않거나 보조자료 정도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민족과 국가, 사회라는 거시적 주체에서 지방과 개인이라는 미시적 주체로 이동하게 되면서 구술사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갔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구술사 방법론을 채용한 많은 개인적 연구성과가 생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각종 구술자료들을 채록하고 자료집을 출판하는데 지원을 하고 있다. 그 결과 2000년 이후 구술사 연구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2]
김귀옥은 구술사 연구 현황을 연구 주체별, 시기별로 나누고 있는데, 연구 주체별로는 개인 주체에 의한 구술사 연구와 단체가 주도한 공동 조사 성과물로 대별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1980년대 중 후반에서 시작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의 제1기와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에 이르는 제2기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3]
1기 연구에서는 개인이 비학술적인 목적으로 쓴 구술 기록들을 묶은 저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구술자료를 이용한 책은 1980년대 초뿌리 깊은 나무의 민중자서전 시리즈였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들이 민중의 구술을 채록한 것으로, 목수, 보부상, 옹기장이, 반가의 며느리, 농부와 같은 다양한 민중들의 삶을 채록한 것이었다.[4] 이 외에 주로 해외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한국인 연구자들이 구술사 방법론을 토대로 한국의 무속이나 정치적 사건을 다룬 박사논문도 나오기 시작했다. 김성례는 미시간 대학 박사학위논문으로 “Chronicle of violence, ritual of mourning: Cheju shamanism in Korea"(1989)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1948 4·3항쟁과 대량학살사건을 구술과 참여관찰을 통해 다룬 연구성과이다. 또 윤택림은 미네소타 대학에서 “Koreans' stories about themselves: an ethnographic history of Hermit Pond Village in South Korea(1992)” 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5]
이들 구술기록과 논문 외에 광주민주항쟁 관련 단체들과 제주 4·3항쟁 관련 단체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문제 관련 단체들이 진상규명작업의 일환으로 사건 생존자들의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자료집으로 발간하였는데, 먼저 광주항쟁관련 구술자료로 전남사회운동협의회와 황석영이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1, 2(풀빛, 1985, 1987)과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의 『광주 5월 민중항쟁 사료선집』(풀빛, 1990) 이 발간되었다. 또 이어서 1996년 『5·18 그 삶과 죽음의 기록』(풀빛)에서 나왔다. 제주 4·3항쟁과 관련된 증언집도 출간되었는데, 제주4·3연구소가 관련자 증언을 채록하여 『이제사 말햄수다1, 2(한울, 1989)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가장 활발히 구술 채록 작업이 진행된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해서였다. 이 시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한국정신대연구회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 1, 2, 3(한울, 1993, 1997, 1999)과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995)를 내놓으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사회 일반의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김귀옥은 2기 구술사 연구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진행되어 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시기 구분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는 것은 민주화의 고양이다. 이 시기 중요한 변화는 1기에는 해외소수 연구자들이나과거진상 규명운동의 차원에서 소수 민간 단체들에 의해 공동 진행되었던 구술조사의 외연이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학계연구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공동조사를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는 과거청산운동과의 연계에 있다.[6]
1기에 이어 개인 구술사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한국전쟁시기 월남하여 만들어진 월남인 정착촌을 7개월 동안 현지에서 참여관찰과 월남인들의 생애사를 바탕으로 한 김귀옥의 연구, 「정착촌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속초아바이마을과 김제용지농원을 중심으로-(1999)와 『월남민의 생활경험과 정체성 : 밑으로부터의 월남민 연구』(서울대 출판부, 1999), 『이산가족 : ‘반공전사빨갱이도 아닌』(역사비평사, 2004)를 들 수 있다. 또 전순옥의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2004)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영국 워릭 대학의 박사학위논문을 보완하여 국내에서 출간한 것이다.[7]
또 본격적인 구술사 연구성과물은 아니지만 구술사를 활용한 예로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돌베개, 2000)를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주제로 포인주 · 염미경의 『전쟁과 사람들 :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한울, 2003)가 있다.[8] 이외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원폭피해를 당한 한국인의 기억과 증언을 담은 정근식 편, 진주 채록의 『고통의 역사 : 원폭의 기억과 증언』(2005)이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2기에는 1기에 비해 구술사 방법론, 구술채록의 중요성이 광범위하게 인식되면서 개인연구자는 물론 정부 및 정부투자기관, 연구기관, 민간단체 등의 공동조사가 활발히 진행되어 각종 자료집 및 연구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1기에 이어 정대협[9]에서는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던 희생자들의 증언을 담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풀빛, 2001)과 자료집5(2001)와 자료집6(2004)를 계속해서 펴냈다. 또 제주 4·3 연구소에서도 1기에 이어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이제사 말햄수다 3(역사비평사, 2002)를 펴냈다. 광주5·18민주화항쟁 증언자료집 역시 발간되었는데, 전남대 5·18연구소와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공동으로 조사한 성과물을 『5·18항쟁 증언자료집』Ⅰ~ (전남대학교출판부, ~Ⅲ은 2003, Ⅳ는 2005) 펴냈다.
이들 민간단체와 대학연구소 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구술사와 관련하여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이며, 그 연구성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997년부터 최근까지 역사연구자가 중심이 되어 현대사 복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구술생애사 작업을 진행하였고, 1999년부터 그 성과물들이 자료집 형태로 출간되기 시작하였다.[10] 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체계적인 구술자료 축적을 위해 아카이브즈를 설립,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4년부터 구술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11]
이 밖에 대학연구기관들에서도 한국전쟁, 여성사, 지역사, 노동사, 북한사회 연구 등 다양한 주제로 구술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12] 2002년에 들어서는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연구기관을 지원하여 구술사 연구 작업이 활성화되었다. 지원을 받은 성공회대학교 노동사연구소는 3년에 걸쳐 450여명을 면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논문을 묶어 『1960~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와 노동자정체성』(한울, 2004)과 『1960~1970년대 노동자의 생활세계와 정체성』(한울, 2005), 1960~1970년대 한국노동자의 계급문화와 정체성』(한울, 2006) 등을 발간하였다.[13]
학진 지원을 받은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는 2002 8월부터 북한의 신의주, 혜산, 청진 출신의 북한이탈주민을 구술 조사하여 『북한도시의 형성과 발전』(한울, 2004)로 발간하였고, 역시 2002년부터 학진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한 영남대학교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에서는 『20세기 한국민중의 구술자서전』(소화출판사, 2006)을 펴냈다. 이 자서전은 총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민, 농민, 상민, 노동자, 이주민, 김제 광활면 사람들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구술을 담고 있고, 그 자료의 양도 풍부하여 다방면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14]  
과거 구술사 방법론을 활용한 연구는 주로 인류학이나 사회학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최근에는 역사학계에서도 이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구술사는 영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2005 8 9일부터 14일까지 KBS광복60주년 특별기획으로 ‘8.15의 기억 2개 시리즈로 나눠 방송했다. ‘8. 15’의 기억은 8.15 광복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시각차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로서, 프로그램은 개인의 기억에 토대를 둔 구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제작진은 2004 8월부터 1년 여 가까이 1945년 해방부터 1948년 정부수립까지 이른바 3년간의해방공간을 체험한 150여 명으로부터 당시의 기억을 채록했다.  
이상에서 한국에서 구술사 연구의 전반적인 경향을 살펴보았다. 시기적으로 주로 구술대상자가 생존해 있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고, 연구주제 역시 진실규명, 과거청산 등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 현대의 민주화 운동이나 정치적 사건, 사회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구술사 방법론을 통한 한국사 연구는 여전히 대상 시기와 주제가 한정되어 있고 구술기록을 여전히 문헌자료의 보조수단으로만 활용하고 있는 한계가 있지만 신진연구자들에 의해 차츰 연구 대상의 영역이 넓어지고 구술자료를 기존의 문헌자료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하여 이를 주자료로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구술사연구가 생산되리라고 기대한다.  


2. 한국에서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에 대한 연구 및 구술사 현황

1)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관련 연구

한국사학계에서 일제시대 재조선 일본인들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식민지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왔다. 문헌자료를 토대로 한 일제시대 재조선 일본인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경향은 주로 재조일본인이 일본식민지배의 첨병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식민지배의 최하위에서 식민정책을 직접적으로 실현해 가는 식민지배자로서 일본인과 일본인집단의 행태, 생활양식, 인식 등을 분석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 이들 식민자로서 일본인들과 피식민자로서 조선인과의 갈등과 충돌을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난 연구들도 눈에 띄지만 아직까지도 재조일본인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시각은 위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재조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연구 주제는 주로 일본정부의 식민지배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일본인들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일본인 지주나 자본가들, 상공업자의 경제활동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결성했던 각종 단체들과 그 활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15] 일본인의 농업, 상공업 활동에 대한 연구 외에도 일본인이 각 지방사회에서 권력을 획득하고 지역 유력세력으로 등장하는 과정, 지방도시, 지역사회의 형성과 일본인의 활동, 일본인사회단체의 활동 등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16]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해방 직후 일본인의 잔류 또는 귀환을 다루고 있는 연구들도 있다.[17] 이들 연구 중 정병욱의 연구는 해방 직후 미군정의 요구에 의해 잔류하면서 일본인의 귀국을 재정 · 금융면에서 지원했던 일본인들과 조선식산은행 접수위원회의 요청으로 잔류하면서 은행 재건을 도왔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이다. 전자는 조선총독 재무국장 미즈타(水田直昌), 조선은행 부은행장 호시노(星野喜代治), 조선식산은행 이사 야마구치(山口重政), 세 사람으로 이들은 향후 한국경제에 해악을 끼친 인물들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조선식산은행 직원이었던 츄마(中馬三郞)로 해방 직후 한국인들이 은행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정병욱은 이들 4명의 일본인들의 상반된 행적을 그들이 남긴 회고록과 일기를 통해 재구성하고 일본 식민통치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다.[18] 비록 재조일본인들이 직접 구술한 것을 채록하여 활용한 예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 거류했던 일본인들의 기억을 통해 식민지배의 실상과 종말을 재구성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라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까지 한국에서 재조일본인에 대한 연구는 총독부지배정책과 관련인물들에 대한 연구 그리고 일본인지주 · 상공업자 · 지방의 유력일본인들의 활동을 통한 정치, 경제적인 거시적 차원의 연구만이 이루어져 왔다. 활용하는 자료 역시 각종 식민지배기구에서 생산해 낸 기록물들과 신문 ·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 개인의 회고록과 일기 등 문헌자료가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활동과 관련된 기초자료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들이 자료집 형태로 간행되기도 했다. 홍순권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들의 명단과 직업, 그리고 그들이 조직했던 사회단체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두 권의 자료집으로 발간하였다.[19] 2005년 발간된 『일제시기 재부산 일본인사회 사회단체 조사보고』에서는 일제강점기 부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와 행정, 경제, 사회 · 문화, 교육, 종교 등으로 나누어 단체의 목록을 작성하고 각 단체의 소재지, 연혁, 중심인물, 사업 및 활동을 다루고 있다. 또 이 자료와 연속선상에서 2006년 발간된 『일제시기 재부산 일본인사회 주요인물 조사보고』는 총 790여 쪽으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지역에 거주하면서 활동했던 주요 일본인 3천여 명의 이력과 활동 내용 등이 정리되어 있다. 이들 일본인명단은 행정 · 관료, 경제, 종교, 사회 · 문화, 교육 등 5개로 나누어 우리말 이름(가나다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 해방 직후 남·북한 지역에 남아있던 재조일본인의 자산에 관한 조사 자료집도 출간되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들을 정리하고 해제를 붙인 것으로 일제강점기 및 1940~50년대 한국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기초가 될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20]
또 한국측의 연구성과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 관련 일본인이나 조선 거류 일본인들을 다룬 저서들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의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군인에서 상인 그리고 게이샤까지』(2006, 역사비평사, 원제는 『植民地 朝鮮の日本人』, 2002)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1876년부터 1945년까지 약 70여 년 동안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평가하였다. 자신들의 행동을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는 부류, 철저한 자기 비판을 가하는 부류, 역사적 맥락과는 관계없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는 부류이다. 저자는 관변 자료들과 개인의 기록을 이용하여 재조일본인들의 식민지에서 그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대한 개인의 기억과 평가까지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같은 해에 역시 일본인 다테노 아키라(館野晳)의 『韓國 · 朝鮮と向き合つた36人の日本人』(明石書店, 2002)과 『36人の日本人韓國·朝鮮へのまなざし』(明石書店, 2005), 두 권의 책이 합본되어 『그때 그 일본인들』(한길사, 2006)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또 직접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후쿠자와 유키치 등 조선정책이나 조선론을 주장했던 인물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이 조선침략을 주도했던 일본의 정치인도 다루고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들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정책에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거나 조선의 상황에 대해 동정적이던 일본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 대부분은 조선에 거주하거나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지냈던 일본인들의 경력과 활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의 대부분은 개인 기록이나 정부기록 등 문헌자료에 의존하고 있지만 구술을 채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술한 내용도 눈에 띤다. 오야마 도키오(大山時雄, 1898~1946)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용은 비록 당사자로부터 직접 구술을 채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내를 통해 간접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그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21]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인들 중에는 저자 자신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지금까지 한국내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시각-식민지배자로서 조선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일본인상-과 배치되는 인물들-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고 동정하던 일본인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이 책에 대해 한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할 가능성도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학계에서의 연구경향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 즉 일본의 지배와 조선의 저항,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민족갈등이라는 구도에서 좀 더 발전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이 시기를 조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를 새로운 시각,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한국사회 내의 분위기는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직접 증언과 기억을 통해 그 시대를 복원해 보려는 시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구술사 연구

일제강점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고 특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앞으로는 그들의 구술을 통해 그 시대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한 재조일본인과 그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꾸준한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한국인 연구자가 직접 일제시대 재조일본인들의 구술을 채록하여 분석한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앞서 한국내 구술사 연구현황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내에서 일제강점기와 관련해서는 일본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구술사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지만 그 외의 주제를 다룬 구술사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내에서 구술사 방법론을 채용한 연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과거사청산, 진실규명과 같은 현재 한국내 당면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시되면서 이와 관련된 자료 수집 및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국내에서는 기존의 역사나 기록이 사회내 강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인 반면 구술사라는 방법론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지배자이며 사회적 강자로 군림했다고 할 수 있는 재조일본인의 구술을 채록하고 이를 활용한 연구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재조일본인의 구술을 기초로 한 연구로는 최인택의 연구(「일제시기 부산지역 일본인사회의 생활사」, 『역사와경계』52, 2004)를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살았던 경험을 가진 일본인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의·식·주 등 생활 전반에 대해 정리하였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구술사 방법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문헌자료를 함께 활용하는 방식을 택하여 자칫 주관적이고 개별적일 수 있는 개개인의 기억과 삶의 이야기(Life Story)를 사회 혹은 국가라는 집단적 기억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을 수 있으며, 집단의 공통경험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을 추구하고 있다. 즉 라이프 스토리에서 라이프 히스토리(Life History)로 전개해 가는 과정을 일제시기 부산지역 일본인사회와 그곳에서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사례를 통해 추적하고 있다.[22]
우선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 3명의 일본인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사례1의 川原義充씨는 1932년 생으로 부산 大新町에서 거주했고, 부산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종전을 맞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례2 高山明씨는 1924년 생으로 구포에 거주했고 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례3의 石田博明씨는 1931년 생으로 경성에 살았고 경성중학교 2학년 재학 중 종전을 맞이하였다.
사례1의 주인공의 경우 구술에 의하면 당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서로 달랐으며, 학교 역시 조선인학교와 일본인학교가 구분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학생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조선어 역시 몇몇 쉬운 단어들만 알고 있다. 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일본고향에서 지키던 관습에 따라 명절을 지냈다. 종전 직후(해방 직후) 일본으로 귀환하고 난 뒤 오히려 고향의 사투리를 못 알아들어 놀림을 받고,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해 피폐한 내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조선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례2의 일본인 역시 일본인학교와 조선인학교가 따로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지만 조선인과 일상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사례3의 주인공은 조선에서 생활에 대한 회상보다는 일본으로 귀환 직후 일본에서 경험한 귀환자들에 대한 차별과 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피폐한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또 사례1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조선에서 생활이 더욱 풍요롭고 살기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 세 명의 직접적인 구술 녹취 외에 논문에서는 회상기류에서 발췌한 사례를 부록으로 싣고 있다.[23] 그리고 구술과 회상기를 토대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의· 식· 주생활을 재현하고, 교육 및 학교생활, 연중행사와 인생의례,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교류, 경제적 하층민들의 경제생활 등을 분석하고 있다.[24] 또한 종전 이후에도 일본으로 귀환한 재조일본인들이 부산관련 향우회 및 동창회를 조직하여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25]
이처럼 본 연구는 재조일본인의 구술을 기본자료로 활용하고 있지만 더 많은 문헌자료와 회상기를 보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술이 갖는 한계, 즉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담에 머무를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조자료로써 문헌자료를 활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많은 사례를 확보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이 연구처럼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의 구술을 바탕으로 연구하고자 할 경우 한국인연구자가 일본으로 직접 찾아가 구술을 채록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많은 비용과 시간을 요하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다량의 구술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문헌자료를 적극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국내에서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에 대한 구술사연구는 아직까지 미진한 상태이고, 구술은 여전히 문헌자료를 메인으로 하는 연구에서 보조자료 정도로 활용되고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녹기연맹을 다룬 이승엽의 연구(「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가 바로 그러한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녹기연맹에 참여한 경험이 있던 일본인들의 인터뷰를 활용하였지만 회상기와 함께 보조자료로서 활용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2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내에서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 구술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술채록의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한국인연구자의 경우 일본인의 구술을 채록하기 위해서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구술자를 인터뷰해야 하는데 이는 비용과 시간 면에서 적잖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직까지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개인경험이나 일상생활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내에서는 기존의 역사나 기록이 사회내 강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인 반면 구술사라는 방법론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지배자이며 사회적 강자로 군림했다고 할 수 있는 재조일본인의 구술을 채록하고 이를 활용한 연구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3.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기억-재조일본인의 기억과의 비교

한국 내에서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에 대한 구술사 연구는 아직까지 초보적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조선인, 한국인의 구술을 채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점차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동일한 시대를 살았지만 그 시기에 대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기억에는 분명히 어떠한 간극이 존재할 것이고, 따라서 양자의 기억들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일한 시대에 대한 기억의 간극은 일본인과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민족적 간극 외에도 계급, 남녀의 차이, 교육의 차이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식민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기억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일차적으로 살펴본 뒤 개인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위치, 교육의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기억의 다양성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재조일본인의 기억과 비교될 만한 조선인의 기억을 담고 있는 두 권의 책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책은 일제시대를 살았던 한 가족의 가족사를 그린 것이다.[27] 책의 저자는 물론 저자의 아버지, 고모가 모두 당시의 저명한 인물들로서 그들의 경험과 기억은 평범한 조선인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자신이 경험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상생활은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경험한 것과 별 차이가 없는 듯 하다.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의 학교생활이라든가, 일본어사용, 창씨개명에 대한 기억, 일본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예식, 신사에서 행해지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이라면 흔히 떠올리는 그러한 기억들이다. 또한 당시의 총독부의 정책에 대해 조선인으로서 반감을 가지거나 전시상황에 대해 일본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만을 사용하라는 일본어전용정책에 대해우리는 조례와 종례 때 하루 두 번씩황국신민의 誓국어 상용의 서를 큰 소리로 외쳤다.…상용이라는 것은 수업 시간뿐 아니라 쉬는 시간에도, 집에 가서도 일본어를 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는 생활을 외국어로 하라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우선 한국인이 부모형제와 일본어를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나이 많은 부모 중에는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안다 하더라도 생활 정서상 식구끼리 일본어가 나올 리 없었다. ‘국어 상용의 서문구를 날마다 주문처럼 외우면서 우리는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는 이중성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우리는 곧잘 일본어를 쓰되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말하기를 즐겼다. 억양을 완전히 우리말 식으로 하고 발음은 되도록 탁하게 했다[28]고 하여 조선인이 일본어만을 전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며, 학생들끼리는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유희화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다.
또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숭배를 바라보는 시각도한국인이 볼 때 일본인의 습관 중에서 가장 낯선 것이 바로 천황에 대한 지나친 예였다. 교장이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칙서를 머리 위까지 높이 쳐들고 걸어가는 것은 솔직히 꼴불견이었고, 신사 앞에서 손뼉을 치고 절을 하는 것도 관객의 호기심으로 바라볼 일이지 정색을 하고 우리가 할 일은 아니었다[29]고 하여 천황숭배나 신사참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저자는 또 창씨개명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도 적고 있는데우리가 여학교에 들어가던 해, 그러니까 1941년을 전후해서 총독부에서는 한국인에게 창씨개명령을 내렸다. 왕족이나 작위를 가진 귀족 혹은 유력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성을 일본식으로 갈아야 했다. 학교에 가거나 취직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행위에는 일본식 이름이 있어야 했다. 성을 바꾼다는 것은 가계를 존중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일 지독한 욕이성을 갈라인 것을 보아도 그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총독부가 권력으로 강요하니 저항을 해보아야 헛일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성인에다까짓 밭 전田 자나 하나 붙이자.”며 羅田으로 성을 고치고 이름들은 한국식으로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아버지 이름은 羅田景錫이고 내 이름은 羅田英均이 되었다. 일본어로는 이것을라뎅이라고 발음했다. 일본 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 성도 아닌 이 성을 말하거나 들을 때마다 나는 야릇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 때문에 우리 동창생들은 지금도 만나면 일본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야 하는 웃지 못할 처지에 있다. 한국 이름으로는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마끼노상이니 미즈하라 상이니 하면서 그때마다 묘한 감정을 맛보는 것이다.”[30]
쌀 배급제에 대한 회상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신교동(저자가 살던 서울의 한 동네)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전쟁은 일본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우리야 암거래를 해서라도 배불리 먹어야겠다는 심사였으나 일본인들은 정부의 지시를 충실히 잘 지켰다. 어쩌다 어머니를 따라 이웃집에 가보면 부엌은 취사를 언제 했나 싶게 텅 비어 있을 때가 많았다[31]고 회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세대이므로 이미 80세를 넘어선 고령의 노인이지만 영문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개인적인 기억 외에도 가족사를 복원할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적 배경까지 정리하여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 앞서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구술을 채록하여 엮은 책이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Hildi Kang Under the Black Umbrella - Voices from Colonial Korea, 1910-1945(Cornell University Press, 2001)이 그것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를 경험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구술을 채록하여 엮은 책이다. 저자는 책의 구성을 두 파트로 나누어 살피고 있는데, 이는 시기와 일제의 통치형태에 따른 구분(Part Ⅰ은 1920-1931, Part Ⅱ는 1931-1945)이기도 하지만 전자의 경우 인터뷰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행동을 한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일제의 강압에 따라 변화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6개의 주요 구술과 그 밖에 여러 구술들을 채록하였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한국인들 중 현재 미국의 한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만을 구술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겠지만 그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출신지나 교육 정도, 신분, 종교, 경제력 등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구술자들의 경험과 기억은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한국인들의 다양한 삶을 어느 정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나한테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없었어. 일본인들도 나쁘지 않았고, 같이 잘 지냈지. 우리를 괴롭힌 건 순사였고, 난 그저 그들만 피하면 됐어라고 술회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그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32]      
이상에서 살펴본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의 기록들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식민지시기를 재구성하고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대를 살았던 재조일본인들의 기억 역시 그 시대를 재구성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은 이미 고령이 되어 그들의 경험과 기억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자료화하는 작업은 매우 시급하다. 시간과 공간적 제한 때문에 한국인이 일본인의 구술을 채록하거나 일본인이 한국인의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다면 각각 한국인은 한국인의 구술을, 일본인은 일본인의 구술을 채록하여 자료화한 것을 서로 교환하고 공동 연구할 수 있다면 보다 효율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다만 각각의 역사적 위치와 입장의 차이로 인해 관심이나 시각이 틀릴 수 있고 그에 따라 구술을 채록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차이가 반영되어 각각 원하는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겠지만 이것 역시 공동작업을 통해 조율해 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1] PhD Candidates, Korea University, Graduate School, Department of Korean History .
[2] 윤택림 · 함한희, 『새로운 역사 쓰기를 위한 구술사 연구방법론』, 아르케, 2006, p. 15.
[3] 김귀옥, 「한국 구술사 연구 현황, 쟁점과 과제」, 『사회와 역사』71, 2006.
[4] 이 외에도 정순덕 구술, 정충제 기록, 『정순덕』, 1989 ; 김진계 구술, 김응교 기록,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1990가 출판되었다.
[5] 이 논문은 2003년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6] 김귀옥, 앞의 논문, p. 328.
[7] 김귀옥, 앞이 논문, p. 329~330.
[8] 윤택림, 앞의 책, p. 37.
[10]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펴낸 구술자자료집 목록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 『격동기 지식인의 세가지 삶의 모습』,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팀,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 200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내가 겪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정부』, 선인, 2004 ;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선인, 2004.
[11] 2004년도 구술자료수집 주제는 해방 이후 협동조합운동, 미국내 태권도 조직형성, 광주전남의 사회경제사, 해방 이후 대학교육과 사회과학의 제도화, 가족계획 정책의 수립과 시행, 해방후 면방직공업, 1994년 북핵 위기 관련, 한국군과 백선엽, 새마을운동, 전통 생업기술사, 전남 장흥군 지역민의 생애사, 한센병연구, 천도교, 해방후 제주도 엘리트 집단, 1970년대 노동정책, 비전향장기수 이다. 
[12] 구술사와 결합하여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는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로, 『전쟁과 사람들 :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한울, 2003), 『구림연구 : 마을공동체의 구조와 변동』(경인문화사, 2003), 『지역전통과 정체성의 문화정치-장성 황룡연구』(경인문화사, 2004) 등의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또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에서는 2000년 『주민생애사를 통해 본 20세기 서울현대사』를 펴냈다.
[13] 김귀옥, 앞의 논문, p. 337~339.
[14] 김귀옥, 앞의 논문, p. 339~340.
[15] 박재상, 「한말일제초기 목포일본인상업회의소와 경제침략」, 전남대학교 사학과 석사논문, 1999.   조승연, 「일제하 농업생산기반의 형성과 일본인대지주의 농장경영-전북 김제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민속학연구』6, 1999.  박재상, 「한말일제초기(1897~1915) 목포일본인상업회의소의 구성원과 의결방안」, 『한국민족운동사연구』26, 2000.  강명숙, 1920년대 일본인자본가들에 대한 조선인 자본가들의 저항-평양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90, 2000 ;1920년대 일본인 자본가들에 대한 조선인자본가들의 저항 Ⅱ」, 『안중근과 한인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 1920년대 일본인 자본가들에 대한 조선인자본가들의 저항-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30, 2002.  이규수, 20세기초 일본인 농업이민의 한국이주」, 『대동문화연구』43, 2003.  차철욱, 「개항기~1916년 부산 일본인 상업회의소의 구성원 변화와 활동」, 『지역과역사』14, 2004.  김수희, 「어업근거지 건설계획과 일본인 집단 이민」, 『한일관계사연구』22, 2005.  최원규, 「일제시기 일본인 지주의 토지확대와 소유변동의 추이-전북 옥구군 서수면 사례-, 『동방학지』130, 2005.  김수희, 「일제시대 고등어어업과 일본인 이주어촌」, 『역사민속학』20, 2005.  최원규, 「일본인 지주의 농장경영과 농외투자」, 『지역과역사』17, 부경역사연구소, 2005.
[16] 최유리, 「일제하 통혼정책과 여성의 지위」, 『국사관논총』83, 1999.   이승엽, 「일제하 녹기연맹의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10, 1999 ; 「내선일체운동과 녹기연맹」, 『역사비평』50, 2000.   신주백, 「일제의 새로운 식민지지배방식과 재조일본인 및 자치 세력의 대응(1919~22), 『역사와현실』39, 2001.   송규진, 「일제 강점 초기 식민도시 대전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일본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아세아연구』108, 2002.   홍순권, 「일제시기 부제의 실시와 지방제도 개정의 추이-부산부 일본인 사회의 자치제 실시 논의를 중심으로-, 『지역과역사』14, 2004.   이준식, 「일제강점기 군산에서의 유력자집단의 추이와 활동」, 『동방학지』131, 2005.   박철규, 「부산지역 일본인 사회단체의 조직과 활동-1910년대를 중심으로-, 『역사와경계』56, 2005. 
[17] 최영호, 「해방 직후 재경일본인의 일본귀환에 관한 연구」, 『전농사론』9, 서울시립대학교, 2003,    정병욱,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64, 2003.    조용욱, 「일본내 한인의 귀환과 한국내 일본인의 송환에 관한 해방 직전 미국측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33, 2005.    노기영, 「해방 후 일본인의 귀환과 중앙일한협회」, 『한일민족문제연구』10, 2006.
[18] 정병욱,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64, 2003.
[19] 홍순권,『일제시기 재부산일본인사회 사회단체 조사보고』, 선인, 2005 ; 『일제시기 재부산일본인사회 주요인물 조사보고』, 선인, 2006
[20]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해방 직후 한국 소재 일본인 자산 관련 자료』, 선인, 2005.
[21] 다테노 아키라 편저, 『그 때 그 일본인들』, 한길사, 2006, pp. 321~327.
[22] 최인택, 「일제시기 부산지역 일본인사회의 생활사-경험과 기억의 사례연구-, 『역사와 경계』52, 2004.
[23] 최인택, 앞의 논문, pp. 132~145.
[24] 최인택, 앞의 논문, pp. 120~128.
[25] 최인택, 앞의 논문, pp. 128~129.
[26] 이승엽은 녹기연맹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녹기연맹이 총독부의 외곽정보단체, 또는 사상파괴공작단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내부의 구성원들은 녹기연맹을 사회교화단체, 또는 종교수양단체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며, 그 예로 1940년대 淸和女塾을 다녔던 요시오카 마리코(吉岡萬里子)의 구술을 직접 채록하여 인용하고 있다.(이승엽, 「녹기연맹의 내선일체운동 연구-조선인 참가자의 활동과 논리를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0, p. 33.) 이승엽은 요시오카씨 외에 진노 스스무(神野進), 쯔보이 사찌이(坪井幸生)씨를 일본에서 인터뷰하여 활용하였다.
[27] 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식인으로 살았던 저자의 아버지 나경석에 대한 회고록이자 저자 나영균 자신의 개인기록물이다. 저자의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와 저자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 전반을 살펴보고 있다는 점에서 구술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8] 나영균, 앞의 책, pp. 203~204.
[29] 나영균, 앞의 책, p. 205.
[30] 나영균, 앞의 책, pp. 206~207.
[31] 나영균, 앞의 책, p. 208.
[32] Hildi Kang, Under the Black Umbrella - Voices from Colonial Korea, 1910-1945, Cornell University Press, 2001. p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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