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承喜研究 江原大学校 舞踊科 申恵淑教授の論文
江原大学校 舞踊科 申恵淑教授の論文
(現在、日本語に翻訳中)
원초적 감성을 기교로써 승화시킨 춤의 세계
신 혜 숙
강원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무용학 ![]() 근대시대 무용문화의 선구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승희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태어났다.(대백 월간 1989. 4.) 지금은 최승희의 가까운 친척은 홍천 제곡리에는 없고, 그녀의 5촌 조카 딸 최경희가 생존해 있어 최승희에 유년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최승희는 7∼8세 때 서울로 올라온 최승희는 숙명학교를 다녔다. 1920년대의 한국은 무용이라는 말조차 없던 그 시대의 일본의 최고 무용가 이시이 바꾸와 운명적인 첫 만남에부터 최승희는 무용에 눈을 뜨게 된다. 이시이를 따라 일본으로 간 최승희는 이시이에게 현대무용을 시사 받으면서 세계적인 무용가 파브로바, 이사도라 던컨, 메리 뷔그만과 같은 사람들의 춤을 보고 현대적 움직임과 표현의 특색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꾸 연구소에서 3년 간의 수학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창작에 몰두한다.
작품 활동
최승희는 한국에 돌아와 한국무용을 창작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 작품 「오야야」, 「농촌 소녀의 춤」, 「밤이 밝기 전」, 「운명을 탄식하는 사람」들이 선보였다. 「저물어 가는 봄」등의 창작 무용을 자선 무용공연과 신춘음악 무용공연 등에서 보여주었다. 1931년 한국의 신무용 전성시대를 이룬다. 최승희는 안막과 결혼 한 후 국내에서 무용 발표회가 성공적이자 북미·남미·유럽 등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기로 결심한다.
1938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무용 공연 평을 들어보면
“최승희는 현재 세계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균형이 잡혀 있고 무한한 우아함, 정교하게 움직이는 손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기술의 화장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춤은 화가의 예술처럼 관객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그림이 되고 있다.”(이사벨 모세존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라고 했다. 유럽의 벨기에,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의 제네바, 이탈이아 등지에서 공연하면서 이 시대의 조선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한다.
최승희의 두 번째 미국 공연에서 아메리칸 발레 카라반(나중에 뉴욕 시티 발레단이 됨)과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과의 협연을 했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 무용가가 되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중남미 공연에서의 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승희는 창작에서 예리한 감각을 살린 무용가이다. 그 얼굴과 몸짓으로 비상한 정신 상태를 아주 이질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민족 고유의 특성이 무용에 힘있게 독창적이면서도 풍부한 변화를 주는 가운데 표현되고 있다.”(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라피코)
북한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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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월북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월북한 그 다음 해인 1947년 첫 발표회가 끝날 무렵이였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예술가로서의 창작욕구나 개성이 상실된 압제적 창작활동으로 인해 그녀는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정치적 예술활동으로 최승희는 1951년 들어서면서 바쁜 일과를 보낸다. 그의 활동 및 선전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김일성의 남다른 배려 때문이었다.
무용극 「맑은 하늘 아래에서」의 내용은 휴전 후의 북한의 농촌을 무대로 전쟁으로 인해서 파괴되어 버린 것들로부터 다시 농촌을 복구하는 젊은이들으 건설 의지를 주제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성의 이야기」는 북한의 최초로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컬러 영화이며 동구에 수출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최승희가 직접 주연한 무용영화이며, 그 당시에는 높은 사회주의적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입상하여 최승희의 존재를 재확인시켜 준 작품 중의 하나다. 어떻든 최승희는 북한의 무용발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무용의 무보를 남겨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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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어린이를 위한 군무로 「보고 싶은 원수님」, 「너도나도 깨끗하게」, 「산보가는 날」, 「노래하는 5.1절」 등이 있으며 국민학교 학생들을 위한 군무로는 「어린이 무곡」, 「자유가」, 「혁명가」, 「토끼 기르기」, 「천리마 타기」가 있다. 중학교 학생들을 위한 군무로 「혁명을 위하여」, 「회상 기원기」, 「곤충잡기」, 「군사유희」가 있다. 그리고 기술학교 학생들을 위한 군무로 「부채춤」의 무보가 실려 있다. 북한에서 잠시 최승희를 부르조아 잔재가 나타났다는 미명하에 활동에 제재를 가한다.
1960년대에 재일교포들의 강제적 북송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최승희의 일본 방문을 초청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북한에서 최승희의 연금이 풀려지게 된다.
연금에서 풀린 최승희는 북송교포 영접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는 이미 무용 연구소도 빼앗겼으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되어 ‘국립무용극장’의 평지도원으로 명목을 유지하게 된다. 최승희는 노구를 이끌고 지도원을 하면서 근근히 이어지던 1960년대 후반 최승희의 무용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있다.
예술세계
춤의 근대화와 대중화 그리고 통속화로 한국 춤의 근·현대에 관객의 폭발적 인기를 얻은 최승희의 예술세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탁월한 신체와 빼어난 용모, 때론 요염하기까지 한 최승희의 자태는 관중을 매료시킬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녀는 관중의 흥미에 근거한 심미안을 자기 도취적, 자기 만족적인 관념의 유희로 포장하는 탁월한 기술자였다. 원초적 감성이 의도화 된 기교를 사용한 기교주의의 최승희는 자신이 보유한 최상의 조건으로 형식적 기교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적 형태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마리 뷔그만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창작 기법 도입과 자기 무용의 주제를 민화에서 옮겨 돌연히 해학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는 그 탁월한 안무 능력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녀의 무용은 그 주제에 관한 한 어떤 측면에서든지 숙련의 극치를 나타내는 완전한 연기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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