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일본인의 식민지경험에 대한 구술조사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 최상진(崔相振)・야마구치 카요(山口華代)
한미일 3개대학 차세대 연구자 국제워크숍 2007
「식민지 근대 연구의 전망-재조일본인의 구술조사를 중심으로」
2007년 2월12일(월),
UCLA
재조일본인의 식민지경험에 대한 구술조사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
최상진(崔相振)・야마구치 카요(山口華代)
1. 들어가며―조사목적
식민지시기에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이하, 재조일본인으로 통일한다)은 수없이 많다. 현재 그들은 죽었거나 다들 고령화로 인해, 그 당시 한반도에서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 또한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들어,
1945년을 시점으로 40살이었다고 한다면 벌써 100살이 넘은 상태이고, 당시 10살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70살의 고령이 되었다.
이 조사의 목적은 이처럼 긴급성을 요구하는 재조일본인의 식민지 경험을 구술조사라는 방법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데 있다.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식민지시기에 한반도에 거주한 재조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구술조사를 진행중이다. 본 발표는 지금까지 진행된 조사연구의 중간보고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또한 조사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통해 한반도 식민지 연구의 새로운 접근가능성에 대해서도 더붙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종래의 식민지연구가 특정한 정치, 경제적인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진행된 감이 없지않다. 거기에 비해, 한반도에 거주한 재조일본인에 대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들에 대한 관심은 배제되어 온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때문에 본 조사는 거시적인 접근보다는 식민지 조선에서 재조일본인이 경험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자연스럽게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가능한 한 다양한 문맥속에서 그들의 경험을 기록, 정리하게 되었다. 더나아가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해, 지금까지의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연구와는 달리,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식민지 근대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조사과정
(1)조사대상지역 선정
본 조사는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조사를 위해 지역을 한정하기로 의견을 통일하고, 규슈대학이 위치한 후쿠오카시와 그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구술조사를 진행하였다.
이처럼 조사대상지역을 한정함으로써 재조일본인의 전체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지만, 후쿠오카시와 그 주변지역을 대상지역으로 선정한 적극적인 이유는 그 당시 이 지역이 引き上げ港(히키아게코; 인양항, 이하 인양항으로 통일함)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즉, 본 조사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재조일본인의 소재파악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자료1】에서 알 수 있듯이 후쿠오카와 그 주변지역은 그 들이 인양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도일한 그 들의 추적조사를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 당시 재조일본인을 본적지 별로 나누었을 경우,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향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후쿠오카가 속해 있는 규슈지역이 가장 많다.【자료2】
(2)조사과정
조사과정에 있어서 정보제공자(조사대상자)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정보제공자를 확보하기 위해, 규슈대학은 조사초기과정에 있어서 한반도를 매개로 형성된 재조일본인의 네트웍[1]을 집중적으로 해명하는 일에 초점이 마춰졌다.
우선, 정보제공자의 소재 파악을 위해 매스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몇 차례에 걸친 신문기사 보도를 통해 재조일본인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었다.【자료3】
또한, 재조일본인의 네트웍 파악과 병행하여 조사와 관련된 기초적인 문헌을 수집, 정리하였다. 즉, 문헌조사는 조사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한국과 일본 국내에 현존하는 사료 및 행정자료, 재조일본인들이 간행한 출판물, 그들을 테마로한 간행물 등에 대한 기초조사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재조일본인의 네트웍 파악은 동창회나 직업단체 뿐만아니라 가족이나 우인관계와 같은 조직화 되지 않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졌다. 또한 네트웍의 형성시기도 시기적인 구분을 설정하지 않고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지거나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을 모두 시야에 넣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로「지역분산형 네트웍」이다. 이것은 거의 식민지기에 형성된 대인관계가 그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즉, 학연을 기초로 한 동창회나 지연을 기초로 한 친목회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지역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둘째로「지역집합형 네트웍」이다.「지역분산형 네트웍」에 비해,「지역집합형 네트웍」은 해방이후 한반도의 거주 경험이 매개가 되어 형성된 네트웍으로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 중심으로 개인 및 사회적인 목적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이번 조사를 행한 후쿠오카지역의 경우에도 몇 개의「지역집합형 네트웍」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예로서「引き上げ港・博多を考える会(인양항・하카타를 생각하는 모임)」[2]을 들 수 있다.
(3)구술조사
이러한 작업을 통해 소재가 파악된 재조일본인에 대한 구술조사를 실시하였다.
구술조사시 가능한 한 테마를 한정하지 않았으며(다만, 최소한의 공통된 질문항목을 준비하였다), 그들이 한반도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한 사실에 대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정보제공자의 동의하에 영상, 음성을 기록으로서 남겼다.
3. 조사경과보고
(1)구술조사
구술조사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주로 후쿠오카와 그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구술조사는 정보제공자 1인에 한해 평균 2회를 실시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1회 또는 3회 이상 조사를 실시하였다. 인터뷰 시간은 1회 평균 약 3시간정도였다.
저희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구술조사를 실시하여 상당수의 데이터를 축적하였다.【자료4】 다만, 여기서 지면상 데이터 전부를 소개할 수 없으므로,
1923년 목포에서 태어나 13살까지 한반도에 거주했던 F・T씨(남)의 사례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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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씨(남)의 사례-1923년(大正12년)
목포태생, 목포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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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에 관한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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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7일, 조사원(야마구치 카요・최상진)은 당시 목포에 거주했던 F・T씨(남)의 자택(야마구치현 오오시마군)에서 구술조사를 실시했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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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거주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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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까지 한반도에 거주.
1936년에 학교 진학을 위해 귀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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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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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1878년 (明治10) 16살 때 한반도로 건너감.
아버지가 한반도로 건너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잘 모름. 1898년에 개항한 목포로
이주함. 목포에서 回船問屋(배를 통한 물자운송업)을 경영하여, 미쓰이물산 (三井物産)과 관계가 있어 미쓰이의
상품 등을 취급하였다.
어머니는 같은 목포에서 배에 짐을 실는 사람(沖仲士)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던 K・K씨의 딸이였다. K・K씨는 조선어에 능통했으며 많은 종업원(조선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F・T씨의 부모님은 목포에서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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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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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일본식 집에 거주(거주했던 집의 배치도를 그려줌으로서 당시의 거주공간을 복원할 수 있었다).
형제가 많았기 때문에「女中」(여자고용인)이 2~3명 있었다.
집안일은 어머니의 지시하에「女中」이 했으며, 주된 일은 아기보기, 세탁, 청소 등이었다.
주로 난방기구로는 스토브를 사용했으나, 온돌방도 있었다. 그러나, 온돌방에서 취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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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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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일본)의 풍습에 따라 설날과 추석은 특별한 날이었다.
집에 있는 고용인 들에게 휴가를 줌. 정월에 목포에 있는
외가집에 놀러감.
F・T씨 본인은 추워서 집에
있었지만, 형제들은 마쓰시마신사(松島
神社)에「참배(初詣)」하러 감.
조선인은 음력 설을 지냈다. 어느날, 악기 소리가 들렸는데
그 것을 통해 이 날이 구정인줄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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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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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부살이하는「女中」으로부터 간단한 조선어를 배웠으며, 현재도 숫자 정도는 외우고 있다.
어머니로 부터 길거리에서 조선인이 팔고 있는 음식을 사서는 안 된다고 들었다. 따로 용돈도 없었다.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었으며, 어머니가 만든 김치를 먹은 적이 있다.
오락은 일본잡지, 레코드, 라디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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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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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일본에 돌아왔는데, 그 때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한반도에서 일본엔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금액이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일본지폐로 만든 신발을 신고, 불단을 등에지고 일본으로 건너옴.
F・T씨 본인은 재학중에
동원되어「南方」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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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저희들은 F・T씨의 집을 방문하여 구술조사를 무사히 마쳤다. 조사후, 추적조사를 위해 구술조사 데이터를 기초로하여 문헌자료와의 대조작업을 했다. 다음은 조사 진행의 흐름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1차조사
▼구술조사 실시
정보제공자의 동의하에
음성기록/영상기록을 데이터화
▼데이터 및 문헌조사
음성기록의 문자화
문헌조사와 구술조사 기록의 정리
추적조사
▼구술조사 내용의 확인 및 데이터 정리
F・T씨와 편지를 통해 구술조사 내용의 확인. 즉, 1차조사와 문헌자료를 대조하여 상이의 정보에 관해서는 정리하여 F・T씨에게 편지로 정보를 제공하고, 본인에 의해 추가 및 수정작업을 행함.
▼현지방문
위의 작업과 병행하여 저희 조사원과 F・T씨가 함께 목포시를 방문. 그 당시 살았던 집과 주변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짐.
위의 정리에서도 언급했지만, 먼저 구술기록과 문헌자료인『在韓人士名鑑』,
『木浦誌』,『朝鮮功労者銘鑑』등의 검토를 통해, F・T씨 아버지의 경력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F・T씨에게 문헌자료 및 추가정보를
제공함으로서 본인이 직접 정보를 추가하거나 정정하는 기회를 가졌다. 즉, 구술조사의 보완, 추가, 정정작업 및 새로운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F・T씨의 요청에 의해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 조사원의 안내로 그 당시 거주했던 목포시를 방문하여, F・T씨가 살았던 집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희들은 F・T씨로 부터 그 당시 살았던 집의 상세한 배치도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자료5】다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구술조사의 애매성이나 부정확성 등의 한계점도 노출되었다.
(2)그 외의 성과
①지도수집;
정보제공자나 네트웍을 중심으로, 그 당시 발행된 지도가 아닌 순수하게 각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된 지도로서, 식민지기 생활 공간을 재현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즉, 일반적인 지도로는 알 수 없는 상점이나 영화관, 지인들의 집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거리나 마을을 재현할 수 있는 자료로서 기대된다[5].
②사진자료수집(가족사진, 졸업앨법, 사진첩등);
구술조사 과정에서 조사대상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사진 및 그 외의 자료를 가능한 한 수집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사진은 개개인의 역사속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단계에 있어서 아직 그 대상자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진을 공개할 수 없다.
③동창회지와 회상록의 수집
거주자들이 식민지기에 재학하고 있던 학교의 동창회 조직은 해방후에 새롭게 조직되거나, 재조직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인양된 후 안정을 찾은 뒤 동창생의 안부를 묻는 형태로 조직되거나, 재회를 목적으로 기록하거나 서로간의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는 물론, 금후 조사를 진행하는데 있어 기초적인 자료가 된다.
회상록은 동창회와는 다른 현재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교류조직이 발행하는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들에서도 동창회지와 비슷한 형태로서 당시의 기억들이 수록되어 있다.
4. 끝내며―조사후 소감과 금후의 과제
본 발표에서는 정치사・경제사나 정부 공식기록 혹은 통계에서 사장(捨象)되어 왔던 개인 레벨의 식민지 경험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재조일본인에 대한 구술조사를 시도했다.
본 발표에서는 목포에 거주했던 F・T씨의 사례를 소개했다. F・T씨 일가가 조선에 건너간 이유는 아버지가 20세기 초두에 조선에 이주하여, 개항후 얼마안되어 목포를 생활 거점으로 정함으로서 시작되었다. 목포가 일본으로 쌀・면화를 실어날으는 항구로서 발전하기 전에 초기 단계에 이주한 일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F・T씨의 아버지는 상매(商売)를 시작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어냄과 동시에 생애의 반려자와 만나 많은 아이를 낳았다.
조사를 통하여 알게된 당시의 생활상은 일본식 집에 살고 일본음식을 먹었다라는 일본식 생활스타일이었다. 틀림없이 식탁에 김치가 올라오고 조선인 여성이 집에서 더부살이로 일했으며 그로부터 간단한 조선어를 배웠다라는 체험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활스타일은 일본식이었다.
다만, 조선인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생활환경 등의 제조건에 있어 각각 큰 차이가 보였다. 예를 들면, F・T씨는「재조일본인」이라고는 하지만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고, 또한 진학을 위해 내지에 돌아왔기 때문에 조선에서
거주한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 학교의 같은 반에 조선인이 있어도 함께 논 기억이 없었는지 조사 중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F・T씨의 내향적인 성격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에서 상매(商売)를 시작한 아버지나 조선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어머니에 비해 조선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재조일본인의 식민지체험이라해도 조선에서 거주한 기간이나 거주지구, 취업경험의 유무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개인차가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한번 추적조사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싶다. 발표에서는 F・T씨의 예를 소개했는데, 이처럼 추적조사에 의해 대상자의 구술기록이라는 것이 때로는 애매하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구술조사가 가지는 한계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한계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또한, 현시점에서 한계성을 극복할만한 결정적인 해결법은 찾지 못해지만, 구술조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한계성이나 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항상 자각(自覚)하면서, 가능한 한 대상자 본인과의 만남의 기회를 늘이고, 조사 그 자체의 완결도를 높혀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구술조사는 정보제공자의
고령화 및 기억의 상실 등에 의해 대단히 긴급성을 요한다. 그렇기때문에 더욱더 구술조사의 유효성・보편성, 그리고 조사방법의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1] 여기서 말하는 네트웍이란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 사이에 이루지고 있는 교류관계를 말하는데, 넓게는 동창회나 직업단체와 같은 의식적으로 조직된 단체이고, 좁게는 가족, 우인관계 등의 조직화 되지 않은 대인관계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했다.
[5] 실질적으로 저희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는, 조사대상자가 당시 거주했던 마을을 방문 하여 조사대상자에 대한 현지인의 기억의 추적조사 및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한 당시 식민지 공간의 복원작업을 시험적으로 시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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